조선 왕조가 망하고 나라가 일본 제국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의 중심에 조선 왕실이 있어야 한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 왕실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의 체제 안에 편입되어 친일 행위를 하며 높은 대접을 받아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죠.
이렇게 된 이유를 알려면 일본이 조선 왕실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고대 중국 주나라의 전통적인 제도였던 '이왕삼각(二王三恪)'이라는 개념을 차용해서 조선 왕족들을 일본 귀족 체제에 흡수하려 했습니다.
이왕삼각은 중국 주나라가 이전 왕조를 멸망시킨 후 그 후손들에게 일정한 제후 지위를 부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겉으로는 존중을 표하면서도 사실상 감시하고 통제하는 정치적 제도입니다.
이왕삼각은 이후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도 수용되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망국의 지도자와 그 가족 및 후손들은 새로운 국가나 체제의 귀족으로 편입되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를 통해 새 왕조는 기존의 왕과 왕족을 숙청하지 않아 백성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인식을 확립할 수 있었죠.
일본은 바로 이와 유사한 방식을 조선 왕실에 적용했습니다.
조선을 병합한 뒤에도 왕실을 완전히 폐지하지 않고, 이왕(李王)이라는 이름으로 명목상 존재하게 했으며, 왕실 재산과 제례를 관리하는 관청인 이왕직을 설치해 통제했죠.
특히 순종은 황제의 칭호를 빼앗긴 채 일본의 통제를 받는 신분으로 남았고, 영친왕 이은은 일본 황족과 결혼하고 일본 육군 장군이 되는 등,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철저히 흡수되었습니다.
왕실은 살아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권한도 영향력도 없이 철저히 무력화된 존재였고 그저 이왕직과 이왕가의 막대한 재산과 일본의 귀족 대접에 길들여져 친일화됩니다.
이는 마치 주나라가 상나라 유민을 달래기 위해 송나라를 세우고, 상나라의 제사를 이어가게 한 것과 비슷합니다.
일본은 조선 왕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대신, 명목상 예우하고 일본식 귀족으로 만들어 민심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왕실을 존속시키는 척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지 못하도록 만든 교묘한 술책이죠.
이러한 상황은 조선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왕실이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고 일본의 제도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전통 왕조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습니다.
왕실을 중심으로 조선의 부흥을 꿈꾸던 복벽주의자들은 좌절했고, 오히려 공화주의와 국민 주권론이 독립운동의 주류 노선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왕정 복원이 아닌 새로운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했던 배경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현실 때문이죠.
결국 조선 왕실은 일제의 통치 전략, 즉 이왕삼각과 유사한 방식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이용당했으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는 단지 왕실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정교한 제국주의 전략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것은 한국의 독립운동이 절대군주제 같은 낡은 국가 체제가 아닌 공화국이라는 보다 근대적인 국가 체제를 지향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제의 이 책략은 조선 왕실 입장에서는 달콤한 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이 공화국을 수립하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아이러니한 결과를 불러온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