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토요일 오후, 보일러가 조금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 평화롭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20년만의 한파를 맞이한 지금, 옥탑의 수도는 얼어버려 수도꼭지조차 안 움직이고, 그 옆의 변기와 물탱크 역시 얼음덩어리가 됐습니다. 101호에서는 수도가 녹지 않는다며 설비 아저씨를 불렀는데,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동안 설비 아저씨가 열심히 담배를 피워가며 탐지를 한 결과 계량기가 얼어서 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쯤 되니 그 옆의 102호도 걱정이 되는군요. 왜냐면 거긴 집주인이 집에 잘 안 들어오거든요. 집이 비어있는 사이에 수도가 터져 물이 넘쳐 흐르고 그게 얼어버린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옥탑 화장실과 수도 시설이야 없으면 불편하지만 삶에 애로사항이 꽃필 정도로 아쉽진 않고요. 그곳에 둔 세탁기를 못 쓴다는 건 좀 뼈아프긴 한데 저는 팬티가 많으니까 일주일 정도는 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1호의 얼어붙은 계량기도 돈주고 사람을 써서 해결은 됐고요. 102호는 사람이 와서 확인해 보니 물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그럭저럭 평화롭지 않을까요? 어쨌건 제가 사는 2층에서 끔찍한 사고가 난 건 아니잖아요. 되는 게 없다고 투정을 부려봤자 나아지는 건 없으니, 모든 게 평화롭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쪽이 스트레스는 덜 받겠죠.
이 와중에 보일러가 조금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다채로운 에러 코드를 뱉어내며 태업을 일삼던 녀석이기에 이번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날이 추워서 보일러가 계속 돌아가니 애가 힘들어서 저런가보다 했지요. 엄밀히 말하면 보일러에서 나는 소리도 아니고요. 보일러에 들어가는 물이 가장 크게 틀어진 소리였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물이야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그런갑다 하기로 했지요. 한시간 동안 계속되니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봤자, 이미 터진 사건이 정리되진 않는구나 싶네요.
요새 집안일이나 신경쓸 게 많아서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뉴스는 기글'이라고 써놓고 하루 지난 뉴스를 뒷북처럼 올리는 게 영 마음이 편치가 않더군요. 리뷰도 테스트는 다 해놓고 글을 못 써서 안 올라가고 있는 게 세개나 되고요. 오늘이야말로 밀린 일은 다 치우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고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야 컴퓨터가 있는 옥탑방으로 갈 수 있거든요.
그리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옥탑에서 수도가 콸콸콸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마션의 첫 문장을 떠오르며 계단을 올라가니 신혼여행 갔을 때의 풍경이 떠오르네요. 온천 마을에 가서 온천은 안 들어가고 '이 집 밥 맛있네'하며 밥만 먹었거든요. 온천은 구경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봤던 온천처럼 옥탑에 뜨거운 김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봐도 음경됐다는 생각을 피하지 못한채로 옥탑의 세탁실에 가 보니 상태가 영 심각하네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이 터져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온 옥탑에 뜨거운 김이 가득했습니다. 한시간 동안 뜨거운 물을 계속 틀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뭔 사건이 터졌을 때 인증 사진부터 찍는다면, 그건 정말 진지하게 망하지 않았다는 소리입니다. 사진을 찍을 여유는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사진이 없습니다. 이 광경을 보자마자 보일러부터 끄러 내려갔거든요.
수도꼭지 주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폰카에선 그 박진감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하여간, 불필요한 가스 요금의 지출은 막았는데 물이 문제입니다. 이 30년 된 다가구 주택은 지하, 1층, 2층이 모두 하나의 계량기를 쓰거든요. 그러니 하나를 메인 밸브를 잠그면 나머지 집들도 모두 물이 끊기게 됩니다. 그렇다고 물이 계속 쏟아지도록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다행이도 마누라가 보일러 아래에서 온수 벨브를 찾아내 그걸 잠그는 걸로 해결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마누라가 결혼을 잘못한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밥 먹으면서 CPU의 제조 공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나, 보일러 벨브 보는 방법을 알게 되질 않나.
보일러는 껐고, 수도도 잠궜으니 이제 어디가 문제인지를 차분하게 찾아봐야 겠군요. 세면대 폼업을 바꿀 때 샀던 대형 스패터를 이럴 때 쓰네요. 물에 젖은 스패너가 얼어버려서 조작이 좀 불편하긴 한데 어떻게 온수 쪽 수도꼭지를 다 풀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 변기 쪽 파이프에 쓰겠다고 사놨던 메꾸라를 찾아서 수도꼭지 구멍에 채워 봤습니다. 처음에는 이걸 왜 샀을까, 잘못 샀다고 생각을 하는 물건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은근히 쓸 곳이 생기게 되네요. 창고도 넓은데 이런 건 버리지 말고 계속해서 모아둘까 봅니다.
메꾸라를 꽉 물려두고 의기양양하게 틀어 봤지만 여전히 물이 새어 나옵니다. 이쯤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제 선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다는 걸. 그리고 이럴 때 저는 전화할 곳이 있습니다. 옆동네에 사시는 아버지요. 어렸을 때는 오히려 밖에서 맞고 들어와서 아빠를 찾았던 적은 없었는데, 크고 나서는 사고를 칠 때마다 아버지 소환을 많이 쓰는군요. 저도 나중에 그런 아버지가 되야 하는데 그럴 자신은 없네요.
물론 아버지도 난감하셨을 겁니다. 아버지가 다년간의 경험이 있으신건 맞지만 이게 본업이었던 적은 없고요. 또 설비나 부속을 갖고 계신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일단 아는 설비업자들에게 전화를 돌려보겠다 하시고, 저한테도 동네 설비업자들을 한번 불러 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 말대로 하는 대신 다른 생각을 품었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물이 어디서 새는지를 찾는 거라고요. 그래서 파이프 위의 보온재를 벗겨봤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답이 나왔네요.
구리 파이프가 찢어져 있습니다. 저기에서 물이 얼었나 봅니다.
저 상태에서 물을 틀면 이렇게 됩니다. 마누라는 저게 왜 이렇게 웃기냐고 그러는데, 저걸 보고도 웃음이 나오다니 미소가많은 여자인가 봅니다. 제가 그거에 넘어가서 결혼했죠.
어디가 어떻게 고장났는지 알았으니 그 다음은 뻔하죠. 아버지가 일단 믹스 앤 픽스와 고무 밴드를 들고 오셔서 떼와봤지만 실패했고요. 집 옆의 옆의 옆의 옆에 있는 설비집에 연락하니 마침 아저씨들이 바로 오실 수 있어서 봐주셨네요. 저 구리 파이프는 가망이 없으니 대충 잘라내고 PVC로 잇기로 했습니다. 구리 파이프를 잘라내고 처리한다는 생각은 저도 했는데, 저는 용접기 같은 복잡하고 묵직한 물건을 생각했고요. 현직은 싸고 편한 방법을 쓰시네요.
공사 끝. 저렇게 구리 파이프에 체결하는 부속이 있나봐요.
그리고 설비집 아저시들과 아버지는 가셨습니다.
뒷정리는 저의 몫이죠.
이렇게 오후를 다 써버렸으면 다시는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하는데, 이 뒷처리를 다 하고 내려오니 이젠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보일러는 돌아가고 난방도 되는데, 뜨거운 물을 틀어도 보일러에서 온수가 켜지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네요. 그리고 지금은 주말입니다.
씁...
겨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