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국문과로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고, 여전히 제 취미이기도 하며, 저를 언어학도로 이끌게 만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자입니다… 중학교 때만 해도 한자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는데 고등하교를 진학하고 나서 일본어를 배우다 보니 한자와 친해졌고 덕분에 좋은 은사님을 만나 사서삼경 중 논어나 맹자 같은 책을 맛보기(?)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래봤자 지금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따위밖에 모릅니다만…
아무튼 각설하고. 한자의 자형은 왜 이렇게 달라진 걸까요? 여기 세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같은 글자가 국가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디스플레이 환경에서 사용하기 위해 삐침(serif)을 제거한 폰트san-serif마저 국가의 자형 차이를 반영하고 있고,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으면 각 국가의 사용자들이 클레임을 걸기도 합니다.
먼저 曜를 볼까요? 이 한자는 빛나다耀라는 뜻을 가진 한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한자를 요일曜日이라는 한자어로 더 잘 알고 있지요.
어느 한자가 어떤 국가에서 사용하는 자형일까요?
맨 아래 사진을 기준으로, 중국(간체)-중국(홍콩·대만)-일본-한국입니다. 동그랗게 강조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삐침의 방향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통적인 해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고, 일본의 것은 우선 논외로 두죠. 중국에서 쓰이는 자형을 보면 행서와 같이 좀 더 필기체에 가까운 형태가 굳어졌다고 볼 수 있겠네요.
사실 일본과 한국의 자형은 붓글씨보다는 조판의 활자체에 더 가까운 모습입니다. 흔히 말하는 강희자전체를 의미하죠. 좀 더 기교에 가까운, 예술적인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骨을 볼까요? 뼈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용하는 자형이 같기 때문에, 각각 간화체-정체(대만·홍콩)-한·일이 되겠습니다.
이 한자에 붙은 모양자 月는 사실 달을 뜻하지 않으며, 본의는 肉입니다. 즉, 육달월부라고 합니다. 정체는 필기체 획을 제대로 반영한 형태를 띄고 있네요.
반면, 간화체의 경우 요소의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 편이 한자를 처음 익힐 때 헷갈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컴퓨터로 전산화된 문자를 입력하는 현 시점에서는 간화 정책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헛짓거리가 되어 버렸지만요.
역시 한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자형은 흔히 명조明朝라고 부르는 강희자전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松는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왼쪽부터 간화체-정체(홍콩·대만)-일본-한국 자형이네요.
간화체는 필기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양자 公에서 厶 부분의 획이 필기체처럼 한번에 그은 모양입니다. 대만에서 사용하는 정체 역시 필기체의 형태가 반영되었으나, 모양자 公의 갓 형태八는 활자체의 그것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대만은 한자 교육을 국가 차원에서 무게를 두고 있고, 자형의 원류를 찾아서 본디 형태를 지속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책받침부辶 등을 보면 확실히 예스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자형은 신자체新字体답게 일부가 간화된 형태를 띕니다만 厶는 전통적인 모양에 가깝습니다. 역시 활자와 연관있는 자형으로 강희자전체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자형은 완전한 강희자전체입니다. 우스개소리로 한국 한자가 진짜 정체자라는 그런 농담도 있는데 한국 표준 한자 자형은 거의 대부분이 강희자전체와 일치합니다. 대만의 자형 변경은 주로 금문이나 갑골문을 따라가는 것이 많아 해서에 기반을 둔 강희자전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답니다.
삐침의 차이는 결국 한자를 붓으로 직접 쓰는지 아니면 활자로 찍어내는 것이 굳어진건지를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꽤 최근까지도 활자보다는 직접 필기를 했던 것이 자형에 반영되어 간화된 모습을 볼 수 있고, 일본의 경우 일찍이 인쇄술이 도입되어 활자체가 스며들 여지가 많았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한국 역시 일본 인쇄술을 그대로 수입하여 그 자취가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 중도에 간화된 자형을 사용하게 되었고 한국 역시 신자체를 오랜 기간동안 사용했으나 일제의 잔재를 밀어내자는 운동과 함께 상당수의 자형이 강희자전체에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글을 끝마치기 전에 好의 자형도 보고 갑시다. 왼쪽부터 간체-정체-한·일 자형입니다. 중국의 자형은 필기체에 가깝고 한국과 일본의 자형은 활자체에 가깝네요. 대만에서 쓰이는 정체는 획을 긋는 방향이 좀 더 반영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잡설이 길었네요. 사실 이건 언어학보다는 폰트라던지 시료 분석에 가까운 거긴 한데 아무튼 예전에는 이런게 좋아서 막 찾아보고 그랬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2탄에서는 유니코드에서 자형이 분리된 이체자揭/掲와 통합된 이체자葛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