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하드웨어 업계 전반을 아우리는 이벤트는 일년에 두 개가 있습니다. 1월 초의 CES, 그리고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열리는 컴퓨텍스지요. 자연스럽게 CES는 그 해의 상반기, 그리고 컴퓨텍스는 하반기에 나올 제품들이 등장하는 무대가 됩니다. 하지만 최근의 모습은 좀 다릅니다. 코로나 때문에 이런 이벤트가 진짜로 열리진 못하고 온라인 발표로 대체됐으며, 지금 막바지에 이른 CES 2021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직접 제품을 보고 만지는 것과는 느낌이 영 다르지만, 그래도 신제품 소개 경쟁에서 뒤쳐질 수 없기에 굵직굵직한 하드웨어 회사들은 빠지지 않고 올해 출시할 제품을 일제히 선보였습니다.
AMD 라이젠 5000 시리즈 모바일 프로세서
AMD는 노트북 시장에 젠 3 아키텍처를 확장해 라이젠 5000 시리즈 모바일 프로세서를 발표하고, OEM과 라이젠 스레드리퍼 프로의 공급을 늘렸으며, RDNA2 GPU의 시장 영역을 더 늘리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에픽에도 젠3 아키텍처 도입을 확인해 주었지요. https://gigglehd.com/gg/9193474 NVIDIA는 지포스 RTX 3060을 발표하고 노트북 시장에 지포스 RTX 30 시리즈 그래픽카드를 출시한다고 밝혔습니다. https://gigglehd.com/gg/9193578 그 결과 라이젠 5000 시리즈 CPU와 지포스 RTX 30 시리즈 그래픽카드 조합의 노트북이 많이 발표됐습니다. AMD CPU를 고성능 게이밍 노트북에서도 볼 수 있게 됐지요.
인텔의 새 CEO, 팻 겔싱어
인텔은 CEO가 바뀌었습니다. 농담입니다. 팻 겔싱어의 인텔 복귀가 큰 뉴스라서 괜히 한번 써봤습니다. CEO가 제품은 아니죠. CEO만큼 파격적인 소식이 아니라 그렇지, 인텔이 이번 CES에서 발표한 제품은 꽤 많습니다. 리얼센스나 모빌아이처럼 일반 소비자들에게 잘 와닿지 않는 건 제외해도 11세대 코어 H 시리즈 노트북 프로세서, 새로운 펜티엄 프로와 셀러론, NUC 11 시리즈와 그 주변기기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PC 매니아들이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을 11세대 데스크탑 코어 프로세서, 로켓레이크-S도 이번에 발표됐습니다. 출시는 아직입니다. 이번 CES에서 발표된 제품이 다 그렇듯 발표만 했지 출시는 멀었습니다.
11세대 인텔 코어 데스크탑 프로세서의 특징
11세대 코어 데스크탑 프로세서까지 인텔은 참 굴곡진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난 제품 이야기는 다 제처두고 로켓레이크만 봐도 그 험난한 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오랫동안 잘 써먹었으나 이제 힘에 부치는 스카이레이크 기반 아키텍처는 이제 버렸습니다. 새 아키텍처인 윌로우 코브가 로켓레이크에 탑재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10nm 공정으로 데스크탑 프로세서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공정 개발과 생산이 여의치 않으니, 10nm에 맞춘 아키텍처인 윌로우 코브를 14nm로 낮춰서 만든 게 사이프러스 코브입니다. 그래서 윌로우 코브를 쓴 타이거레이크보다는 좀 약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인텔은 2015년에 10nm를 출시하고 2017년에 7nm를 내놓겠다고 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2021년에도 14nm를 주력 공정으로 쓰고 있거든요.
물론 인텔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공정과 아키텍처의 준비가 하루이틀 안에 되는 건 아니니까요. CEO를 바꾼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AMD가 아키텍처의 개선을 거듭하며 차곡차곡 성능을 쌓아 올려 라이젠 5000에서 완전히 역전하는 모습을 보여줄 동안, 인텔이 준비하던 공정과 아키텍처의 개발이 어그러지는 악재가 겹쳤습니다. 그렇다고 신제품을 안 낼 수도 없으니 재탕이 됐건 백포팅이 됐건 뭐라도 만들어서 어떻게든 성능을 끌어 올리고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겠죠.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11세대 코어 데스크탑 프로세서인 로켓레이크입니다.
인텔은 11세대 코어 프로세서, 로켓레이크가 기존의 10세대 코어 프로세서, 코멧레이크보다 더 높은 성능을 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높은 성능을 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제품으로서 의미가 없으니까요. 심지어 경쟁 상대인 AMD 라이젠 5000 시리즈보다도 더 높은 성능을 낸다는 게 인텔의 주장입니다. 라이젠 5000과 10세대 코어 프로세서의 성능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건 꽤나 고무적인 결과입니다. 10nm로 만들었어야 하는 걸 14nm로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CPU 성능 1위 자리를 되찾는다는 소리니까요. 그렇다면 나중에 신형 공정을 써서 제대로 만든다면 더 높은 성능을 기대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성능이 조금 이상합니다. 인텔의 CES 2021 컨퍼런스 영상(https://youtu.be/YhjCV0-DrfE )에서 11세대 코어 데스크탑 프로세서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성능 부분은 더더욱 짧습니다. 메트로 엑소더스라는 게임 하나만 넣었거든요. 따로 발표한 자료(https://www.notebookcheck.net/11th-gen-Rocket-Lake-S-Core-i9-11900K-challenges-AMD-Ryzen-9-5900X-in-gaming-tests-as-Intel-previews-11th-gen-45-W-Tiger-Lake-and-Alder-Lake.514457.0.html )에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나오긴 하지만 그것도 로켓레이크의 성능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긴 역부족입니다. 메트로 엑소더스를 포함해 7개의 게임 벤치마크 결과만 소개했거든요. CPU의 연산 성능을 평가하는 방법이 참 많은데 다른 건 전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11세대 코어 프로세서, 코어 i9-11900K의 주요 스펙.
시네벤치 같은 렌더링이야 인텔이 싫어하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로켓레이크에선 더 그럴 겁니다. 신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코어/쓰레드의 최대 구성은 전작인 코멧레이크보다도 줄었으니까요. 코멧레이크는 10코어 20쓰레드 짜리도 있는데 로켓레이크는 최상위 모델인 코어 i9-11900K조차도 8코어 16쓰레드가 고작입니다. 16코어 32쓰레드도 만드는 AMD를 보고 배운게 아니라, 전작보다 오히려 퇴보했다는 소립니다. 좋습니다. 멀티코어는 접어두고 인텔 주장대로 IPC가 올랐으면 싱글 코어만 활용하는 연산 성능도 분명히 올랐을텐데, 하다못해 파이 계산이나 SPECviewperf 같은 항목조차도 넣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이번에 공개한 게임 성능만 놓고 봐도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인텔 CPU가 유리하다고 평가받는 게임만 모아서 테스트한거야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개중에서도 CPU 영향을 덜 받는 게임이라는 소리도 나오지만 그것도 그러려니 합시다. 하지만 High 위에 Very High나 Ultra 같은 옵션이 있는 게임에서 굳이 High 옵션으로 지정해서 테스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래픽 설정이 낮으면 CPU의 영향을 좀 더 받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누구는 High, 누구는 Ultra가 아니라 전부 다 똑같이 High로 지정하거나 아예 Low 옵션으로 테스트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옵션이 일관되지 못하고 들쑥날쑥한 걸까요?
https://newsroom.intel.com/wp-content/uploads/sites/11/2021/01/2021_CES_PressConference_FINAL_1.11.2021.pdf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인텔은 11세대 코어 i7 8코어 프로세서와 라이젠 9 12코어 프로세서를 메트로 엑소더스에서 비교하며(https://newsroom.intel.com/news/ces-2021-intel-news-keynote-event/ ) 인텔은 평균 156.54fps에 최소 75.54fps, AMD는 평균 147.43fps에 최소 74.96fps가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11세대 코어 i7 8코어'가 정확히 어떤 모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로켓레이크고요. '라이젠 9 12코어'라면 라이젠 9 3900X와 5900X가 있는데, 위에 나왔던 그래프에서는 라이젠 9 5900X와 비교했었으니 이쪽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어쨌건 이것만 놓고 보면 명백한 인텔의 우세입니다.
라이젠 9 5900X. DDR4-3200, 지포스 RTX 3080(부스트 클럭 1740MHz). 평균 150.24fps, 최소 76.97fps
코어 i7-10700K. DDR4-3200, 지포스 RTX 3080(부스트 클럭 1740MHz). 평균 139.41fps, 최소 73.88fps
문제는 직접 테스트를 해 보니 절대로 저 성능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로켓레이크 코어 i7 8코어 프로세서는 빨라야 3월에나 나온다니 어떻게 구해서 테스트할 방법이 없지만, 라이젠 9 5900X의 성능은 지금 테스트해보면 되니까요. 메모리는 DDR4-3200으로 맞추고 그래픽카드를 지포스 RTX 3080을 사용했습니다. 카드마다 클럭은 조금씩 다르겠지만요. 벤치마크 방법이야 어려울 게 없습니다. 메트로 엑소더스의 내장 벤치마크를 그대로 쓰면 되니까요. 이렇게 테스트해보니 라이젠 9 5900X는 평균 150.24fps, 최소 76.97fps가 나왔습니다. 인텔의 비교 데이터에서는 평균 147.43fps에 최소 74.96fps였으니 적지 않은 차이죠.
인텔의 로켓레이크-S 테스트 시스템
인 게임 벤치마크라서 테스트 방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도 없고, 테스트 시스템의 조건도 완벽히 똑같이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맞췄습니다. 인텔이 시간과 여백이 부족해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사용한 그래픽카드의 클럭 차이가 성능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테스트 시스템 조건에서 무슨 쿨러를 썼는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CPU 온도가 성능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데 말이죠. 어쩌면 인텔이 몹시 보수적으로 성능을 측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새 벤치마크에서 라이젠 9 5900X의 성능이 오른만큼, 로켓레이크의 실제 벤치마크에서도 성능이 오를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겠죠.
11세대 코어 S 시리즈 프로세서의 주요 특징
147fps에서 150fps가 된 걸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텔이 라이젠 9 5900X보다 코어 i9-11900K가 게임 성능이 좋다며 내세운 그래프를 보세요. 2~8% 차이입니다. 인텔의 공식 발표 자료에서조차 10% 이상씩 압도적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만약 게임에서 AMD가 100fps, 인텔이 105fps가 나왔다고 가정하면 대충 5% 차이가 나는 셈이니, 이대로라면 성능 격차가 더욱 줄어들거나 심지어는 역전할 가능성도 없다고 말하진 못하겠지요. 벤치마크 항목으로 보나 결과로 보나 인텔이 보여준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살짝 찝찝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네요.
인텔의 진정한 변화는 지금 당장은 무리고,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할 거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최소한 알더레이크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죠.
이게 다 인텔이 보여준 게 너무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탓해 봅니다. 라이젠 5000 시리즈에서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인텔은 원래 성능이 좋으니 이번에도 좋겠지'라고 생각했겠지요. 아니면 로켓레이크의 발표 때라도 많은 걸 보여줬어도 됐을 겁니다. 인텔 최적화 소리를 듣는 게임 몇 개가 아니라 다양한 게임과 프로그램에서 성능을 테스트한 결과를 공개하고, 거기서 또 확실하게 성능 격차를 벌렸다면 이런 테스트까지 해볼 생각은 안했을텐데요. 로켓레이크의 발표가 아닌 출시는 빨라야 3월 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누가 CPU의 1인자가 될 것인지 속단하지 말고 관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