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입니다.
뭐 그러면 멸망을 불러온 건 납득하지만 왜 번영을 불러왔나 납득이 안 가실텐데요..
신라는 원래 고조선계 유민과 한반도 남부 경주 지방 토착민이 연합해 만든 삼한의 소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삼한계통 소국들을 잡아먹으며 컸죠.
다들 고만고만한 세력이고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복활동 하면서 서열정리가 필요합니다.
어떤 소국은 처음부터 동맹 내지는 따까리로 활약했을 수도 있고, 어디는 끝까지 대들 수도 있고..
그래서 골품제를 만들어서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들을 경주로 불러들이고 진골에서 4두품까지 분류해서 질서를 잡아줍니다.
신라를 잘 따르거나 도와준 동맹국이나 속국의 지배층은 높은 등급의 골품을 주고 백성들을 우대하며, 반항하거나 저항이 심한 국가는 낮은 골품을 주고 나라를 쪼개거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식으로 말이죠.
자연스럽게 신라와 접한 국가들은 신라에게 대드느니 자발적으로 항복하고, 처음에 저항했던 국가도 차라리 협상을 잘 해서 골품을 잘 받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신라는 그래서 정복지 백성들을 순조롭게 동화시키고 신라인으로 결속시킴으로서 삼국 통일 전쟁까지 복속된 삼한 소국들이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고구려와 백제는 그런 동화 작업이 더뎌서 멸망 때까지도 고구려의 경우는 말갈이나 거란, 백제는 전남의 영산강 일대 마한계 잔여세력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정황이 보이고, 그게 삼국통일전쟁 당시 총력전에서 밀리는 원인이 되었죠.
즉 골품제는 훌륭한 당근과 채찍이었고, 인재 영입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어차피 가망없는 소국에서 지내느니 자발적으로 신라에 들어가 장군이나 대신을 지낸다는 선택지를 주는 건데, 대표적으로 김무력과 김유신이 속한 김해 김씨 가문이 그렇게 영입되었죠.
그런데 그 골품제는 딱 고만고만한 소국들을 흡수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인데 반대 고구려나 백제 등 자신과 동급이거나 더 컸던 세력을 흡수하는 데는 역효과를 불러왔죠.
백제의 경우 신라에게 끝까지 반항해서 최고급 귀족이라도 5품 이하로 낮은 골품을 줬고, 고구려도 왕족인 안승만 진골에 편입했다가 줘다 뺐었고 나머진 6두품입니다.
거기에 진골 귀족들은 가야 멸망 이후 새롭게 편입되거나 승진한 가문이 없어 고인물이 되어 썩어들어갔죠.
물론 신라도 이 골품제의 문제를 알아서 진흥왕 시기부터 친위대를 당시 신라의 변경 지역인 경상도 서부(상주, 문경, 김천, 구미 같은 낙동강 서부 지역)지역에서 뽑아 밀어주기도 하고, 문무왕이 6두품을 밀어준다거나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만든다거나, 당나라에 관료와 학자를 유학보내는 등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골품제의 문제를 잠깐 완화했을 뿐, 근본적으로 폐쇄적이고 고이고 썩은 이너서클을 만든다는 골품제의 문제점을 없앨 수 없었죠.
그걸 해결하려면 모든 귀족과 맞서 싸워 개혁을 밀어붙일 깡이 있는 왕이 필요한데, 그런 역량과 용기를 가진 왕은 한 나라당 한두명 나올 만큼 드물고, 그마저도 국가 초기 제도가 말랑말랑할 때 나오는게 보통이거든요.
즉 골품제는 신라의 성공 비결이자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