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CPU, 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는 컴퓨터의 핵심 부품으로서, CPU의 스펙은 컴퓨터의 성능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글은 CPU 발전 역사에 대한 pcpop.com의 글을 기글하드웨어에서 번역/편집/추가한 것입니다. 일부 사진은 pcpop.com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공하였습니다. 따라서 퍼가실 때에는 반드시 기글하드웨어의 글임을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분히 인텔 위주로 쓰여진 글이긴 합니다만 인텔이 CPU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것도 사실이고, 비록 얼마 전에는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예전의 영광을 다시 찾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이 방대한 역사를 일일이 자세하게 소개한다는 것을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일부 항목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거나 빠진 부분이 있으니 그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세계 최초의 전자 계산기라고 알려진 에니악입니다.

에니악은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연구/제작한 첫번째 전자 계산기로서, 세계 최초의 전자 계산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세계 최초의 '통용/범용' 계산기입니다.

에니악, ENIAC은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1946년 2월 14일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미국 국방부의 협조하에 만들어진 에니악은 탄도 궤적의 복잡한 비선형 방정식을 계산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당시의 '프로그래밍'은 이렇게 수동적인 스위치 조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48만$를 에니악에 투자했습니다. 당시로선 상당한 거금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기술적인 부분에서 본다면, 에니악은 CPU의 개념이 그리 또렸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기본적인 전자 부품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18800개의 진공관을 사용했으며, 사용한 진공관 1개의 크기는 25와트 백열등과 같았습니다. 높이 8피트(2.4m), 너비 3피트(0.9m), 둘레 100피트(30m)의 거대한 크기에 무게 30톤, 소모 전력은 130KW였습니다. 1초에 5천번의 덧셈이 가능하며(사람은 1초에 5번의 덧셈을 할 수 있습니다) 제곱과 세제곱 등이 가능했고, 삼각형의 빗변 수치 계산 등의 더 복잡한 계산도 가능했습니다. 이정도라면 가히 당시 인류 지혜의 최고 수준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에니악은 계산기의 시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대 계산기의 사상적인 기원은 19세기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기술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실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중 제일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바베지의 해석기관입니다.


해석기관의 일부 부품입니다.

영국 황실 학회 회원이자 케임브릿지 대학의 교수였던 찰스 바베지(Charles Babbage. 1792~1871)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유산을 받았습니다. 케임브릿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자신의 수학 지식이 교수를 능가한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뛰어난 천재였으며, 1817년에 석사 학위를 받고 1828년에 케임브릿지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찰스 바베지입니다.

바베지는 과학 이론뿐만 아니라 이를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것도 좋아했습니다. 그는 인류가 통용 계산기를 만들어 낸다면 이를 이용하여 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자 기술이 실제로 응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베지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려 했습니다.

바베지는 그가 설계한 통용 계산기의 이름을 '해석기관'으로 명명하고, 이것이 100개의 변수를 지닌 최고 25자리 단위의 복잡한 계산을 1초에 1번 자동으로 연산해 낼 수 있길 바랬습니다. 해석기관은 기어 방식의 저장소(Store)와 계산실(Mill)을 비롯, 컨트롤러 장치까지 도입하여 저장소와 계산실 사이에 데이터를 보내고 입력할 수 있도록 하길 원했습니다. 이러한 천재적인 발상은 현대 컴퓨터의 5가지 논리 구조와 매우 비슷하며, 나중에 나오는 통용 계산기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처음에 바베지는 정부의 투자를 받아 해석기관을 연구했습니다만, 영국 정부는 1842년에 바베지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였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바베지를 '바보'로, 해석기관을 '어떤 가치도 없는 물건'으라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시인인 바이런의 딸, 오거스타 아다 라블레스 백작부인이 바베지의 연구를 도와주었고, 10진법 대신 2진법을 사용하라고 권하기도 했으며, 해석기관을 방직기와 똑같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프로그래밍의 요소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1981년, 미국 국방부가 10년의 시간을 투자하여 혼합식 컴퓨터 언어를 만들고 국방부에서 사용하는 수천종의 컴퓨터 표준으로 삼았는데, 아다를 기념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의 이름을 ADA로 명명하며 아다를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고 칭송한바 있습니다)

아다는 죽기 전 10년동안 물심양면으로 바베지의 연구를 도왔습니다만, 아다가 죽고 나서 20년 후에 바베지도 해석기관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해석기관의 미완성품은 영국 황실 박물관에 있으며, 바베지의 아들인 헨리 바베지가 이것의 복제품을 몇개 만들어 세계 각지로 보내 보존했습니다. 헨리 바베지는 언젠가 아버지의 유품이 만드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최근 과학자들은 바베지를 정보 과학의 시조로 인식하고 있으며, 1991년에는 바베지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영국 켄싱턴 과학 박물관에서 바베지의 설계도를 토대로 해석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설계도에 존재하는 사소한 오류를 제외하면 복제된 해석기관은 18세기 중기의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여 제작했으며, 실제로 정상 작동하였습니다.


나중에 복제된 해석기관입니다.

이렇게 오래된 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이것이 최소한의 기본 상식이며 제일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이제부터 '진짜 전자 회로를 사용하는 CPU'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찌기 인텔의 탄생 전에 IC 기술은 이미 발명되어 있었습니다. 1947년 AT&T 벨의 실험실에서 3명의 과학자가 트랜지스터를 발명했으며,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을 빠르게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트랜지스터 회로는 계속 그 크기가 줄어들었으며, 1957년에는 '전자 설비를 연결선이 없는 고체 반도체 덩어리 위에 만들어 낸다는' 대담한 발상이 나오면서 이것이 반도체 집적 회로의 핵심 사상이 되었습니다.

1958년, 미국 더글라스주에 위치한 측정 기구 제조 회사의 엔지니어였던 잭 킬비가 반도체 실리콘에 저항, 콘덴서 등의 부품을 내장하여 최초의 집적 회로, IC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공로 덕분에 2000년도 노벨 물리학상은 잭 킬비에게 주어졌지 말입니다. 1959년에는 페어차일드의 밥 노이스가 반도체 집적 회로를 평면 공정으로 만들어 내었으며 여기서부터 집적 회로의 황금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 후에 고든 무어, 밥 노이스, 앤드류 그로브는 페어차일드사를 떠나 새 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인텔의 창업자들. 왼쪽부터 고든 무어, 밥 노이스, 앤드류 그로브.

이 새로운 시장은 완전히 새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회로를 집어 넣을수록-즉 집적도가 높을 수록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인텔의 옛날 로고입니다.

따라서 고든 무어는 새 회사의 이름을 인텔, Intel이라고 정했습니다. 이것은 Integrated Electronics의 머리글자를 적당히 따서 만든 것으로, 그들의 새 회사가 집적 회로 시장에서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했습니다. 결과는 지금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이고 말입니다.

이 세명의 창업자들은 모험 자본 투자가인 아더 락에게서 2백만$의 투자를 받고, 창업에 최적의 위치로 원래 Union Carbide Corporation이 있던 건물을 선택했는데 이는 HP의 창고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1968년 말, 인텔이라는 회사는 만들어졌지만 어떠한 특정 기술이나 제품 생산선도 없었기 때문에, 밥 노이스의 말을 그대로 옳기자면 '그때 모든 기술을 파악하여 어떤 기술이 유망해 보이는지를 찾아, 그 기술의 제일 효과가 보이는 점을 이용하여 그걸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시간도, 돈도,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인텔은 집적 회로의 세밀한 부위에 전자가 나타나거나 사라질때 비트(Bit, 데이터의 제일 작은 단위) 데이터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소형 직접 회로의 실리콘 웨이퍼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들은 먼저 이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1969년 봄 인텔 성립 1주년 이후, 인텔은 최초의 제품인 두개의 극을 지닌 64비트 메모리 칩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머지 않아 인텔은 256비트의 MOS 메모리 칩을 또 출시해내었고, 인텔이라는 작은 회사는 이 2가지 신제품을 통해 모든 계산기 메모리 칩 시장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말 놀랄만한 성과로서, 다른 회사는 1980년이 되어서야 MOS 칩과 2개의 극을 가진 칩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일본 회사들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메모리의 생산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당시 많은 미국인은 일본인의 회사가 낮은 가격으로 미국 제품을 밀어내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서 일본의 칩 제조 속도와 품질은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인텔은 최대의 생존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실로 놀랄만한 결단-메모리를 포기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 올인한다-을 내리게 됩니다.

인텔이 막 시작한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의 첫번째 고객은 일본 비지콤(busicom. 지금은 이미 사라진 회사입니다)으로서, 그들은 인텔에게 프로세서 칩을 설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칩의 연구 과정 중에서 인텔의 연구원인 호프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집적 회로에서 외부 프로그램으로 간단한 명령어 조작을 통해 복잡한 작업을 할 수 있는가? 왜 이러한 계산기의 모든 논리 회로가 하나의 칩에 간단한 통용 프로그램을 통해 쓰여질 수 없었는가? 이는 사실 오늘 모든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원리에 해당하는 발상이지만, 비지콤은 여기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의견이 엇갈리는 회사의 지원을 받으면서 호프는 중앙 처리장치의 모든 기능을 하나의 칩에 내장하고 여기에 저장 장치를 더해, 후에 4004라 불리우는 칩을 완성하였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4004입니다.

1971년, 인텔이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4004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칩은 비지콤의 계산기를 위해 설계된 물건이지만, 이때부터 개인용 컴퓨터의 그림자를 볼 수가 있습니다.


4004의 회로 사진


2250개의 트랜지스터가 직접되어 있으며 트랜지스터의 간격은 10마이크로미터입니다. 1초에 6만번 연산이 가능하고 클럭은 108KHz, 제조 단가는 100$ 미만입니다. 4004는 4비트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내부 명령은 8비트였습니다. 46개의 명령어가 내장되었고 16핀 소켓 패키징을 사용했으며, 데이터 메모리와 프로그램 메모리를 서로 나눠 1KB의 데이터 캐시, 4KB의 프로그램 캐시를 내장했습니다.



이것도 4004입니다. 패키징된 모습이 다르긴 하지만.

4004는 복잡한 수학 계산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에니악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 남었으며, 더 중요한것은 이것이 당시 전용 집적 회로를 사용해 설계하는 경향을 뛰어 넘은 최초의 통용 프로세서라는 것입니다. 모든 전용 집적 회로는 한가지 제품에만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 조건이 변한다면 무조건 다시 설계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제조사의 이익 유지에 상당히 유리한 방식이었지만, 인텔은 통용 하드웨어 설계에 외부 프로그램을 이용해 다른 용도로 응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4004 패밀리입니다. 롬 라이터 4001, 수시 저장 가능한 장치 4002, 출력 설비 칩인 4003, (그리고 사진에는 안나왔지만) 4004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4040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004 CPU는 IBM의 1620에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장발 미국 청년이 무선 전신 잡지에서 4004에 대한 소식을 보고 나서, 이 CPU를 통해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운영체제를 만들어보기로 생각했습니다. 허나 4004에 대한 자세한 관찰 결과 4004의 기능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그가 생각한 운영 체제 기능과 베이직 언어는 그때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197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우게 되는 빌 게이츠입니다.


8008은 C8008, C8008-1, D8008, D8008-1의 4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C8008-1입니다.

1972년 4월에 나온 8008은 4004의 두배에 달하는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8비트 데이터 처리에 2MHz 클럭으로 작동하며 트랜지스터의 수는 3500개입니다. 8008은 텍사스의 데이터포인트에서 설계하였지만 인텔에게 관련 권리를 양도하였고 명령어를 공개했지 말입니다. 인텔은 이를 x86 아키텍처의 기초 부분으로 삼아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C8008입니다.

그때 한 무선 전자 잡지에 8008 프로세서를 사용한 컴퓨터인 마크 8의 소개가 실렸는데, 이는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마크 8은 지금 보기에는 사용, 조절, 프로그래밍, 유지가 매우 어려웠지만 당시의 관점으로는 위대한 발명이었습니다.


D8008입니다.

8008의 시장 반응은 별로였지만 이것으로 인텔은 8비트 프로세서의 기초를 확립하게 됩니다.


D8008-1입니다.

8008 이후로 인텔은 1974년 4월 1일 8080을 출시합니다. 8080은 구조가 더 복잡해지고 새 명령어들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40핀 방식의 패키징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8080A입니다.

8080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알테어에 사용되게 됩니다. 알테어는 스타트렉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어쨌건 가격이 395$라서 '개인용'으로 보기는 좀 어렵고 애호가들의 취미 수준이겠지 말입니다. (1974년의 395$와 지금의 395$는 그 가치가 다르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달만에 10000대 이상을 판매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8080의 코어 사진입니다.

8080은 16비트 내부 버스와 8비트 데이터 버스를 사용하며, 7개의 8비트 레지스터(A, B, C, D, E, F, G, 이중 BC, DE, HL이 조합하여 16비트 레지스터를 조성)가 있고 16비트 메모리를 지원했습니다. 또한 I/O 단자를 내장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외부 설비가 메모리에서 어드레스를 찾는 능력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8080을 사용한 컴퓨터인 Porcessor Technology Sol-20입니다.


Porcessor Technology Sol-20의 내부 사진입니다.

여러분은 8086은 알고 계시겠지만 8085의 존재를 아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8085입니다.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시길.

1978년 6월 9일에 8086이 등장합니다. 최초의 x86 시리즈 칩입니다. 인텔이 4004부터 8085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품들을 만들긴 했지만 8086처럼 PC 산업에 많은 영향을 준 제품도 없었습니다.


8086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IBM의 새로운 PC가 애플을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IBM은 강력하고 쉽게 확장이 가능한 프로세서를 선택하는데 인텔의 x86 프로세서가 절대적인 장점을 발휘, IBM PC의 새로운 두뇌가 됩니다. 역사의 이러한 선택은 인텔이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의 행렬에 오르게 하였으며 Business Triumphs of the Seventies, 70년대의 성공한 기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8086, 8088의 코어입니다.

IBM PC의 성공은 IBM과 인텔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게도 성공의 기회를 주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지금의 성공 기반은 이때의 MS-DOS로 마련된 것입니다.


8086의 보조 프로세서인 8087입니다. 13가지 모델이 있지만 생긴건 다 비슷비슷합니다. 과학 연산 부분에서 높은 성능을 발휘합니다.

지금 사용하는 CPU는 모두 코프로세서를 내장하고 있기에 별도의 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만 70년대의 기술로서는 코프로세서를 별도의 칩으로 만드는 것이 생산 원가를 낮추고 수율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8088입니다. 2.9만개의 트랜지스터, 4.77MHz의 클럭으로 작동합니다.

뿐만 아니라 IBM은 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통해 자사의 PC 라이센스를 개방, 컴팩(지금은 HP가 인수) 등의 다른 회사들이 IBM 호환 PC를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대만  경제가 대대적으로 발전한 것 역시 이러한 역사적인 연합과 선택에 의한 것으로서, 대만은 지금까지도 컴퓨터 관련 부품 산업이 발달한 국가중의 하나입니다.


8088을 사용한 노트북입니다. 128KB 램, 3.5인치 360/720KB 플로피 디스크, 5MB 하드디스크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IBM은 PC XT에 8088을 선택했습니다. 기술적으로 봤을때 8088은 8086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으로 16비트 내부 명령어를 사용하지만 외부 버스는 8비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도스 운영체제와 당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는데는 충분한 스펙이었습니다.


286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80286은 1982년도에 탄생했습니다. 예전 프로세서에 맞춰 프로그램되었던 소프트웨어들을 완벽 지원합니다. 6년 동안의 판매 기간 동안 1500만대의 286 컴퓨터가 판매되었습니다.


80286의 코어 사진입니다.

80286은 14.3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고, 클럭은 처음에는 6MHz였다가 점차 20MHz까지 올랐습니다. 내부/외부 데이터 버스가 모두 16비트이며 어드레스 버스는 24비트입니다. 최고 16MB의 메모리를 장착할 수 있으며 외부 저장장치를 통해 가상 대용량 저장 매체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80286의 작업 범위를 대대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80286의 속도는 8086보다 5배 이상 빨랐으며 IBM은 80286을 AT에 장착하여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80286을 사용한 IBM-PC AT 컴퓨터

그러나 이때 IBM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286 컴퓨터로 빠르게 넘어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AT가 기존의 XT의 판매량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은 286으로의 전환 속도를 늦추길 원했습니다만, 인텔은 이미 80286을 생산해서 창고에 재고를 쌓아 둔 상태였기 때문에 IBM이 이 물량을 다 소화해 주길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IBM 호환 PC를 생산하던 컴팩이 이러한 공백기를 이용, 제빨리 286을 사용한 컴퓨터를 판매함으로서 IBM의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컴퓨터 성능과 속도를 결정하고, 더 빠른 컴퓨터를 만드는 쪽이 컴퓨터 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이 컴퓨터 시장 점유율 게임의 규칙입니다. IBM은 처음에 이 규칙에 순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286에서 이를 거스르는 실수를 하고 맙니다.


상당히 생소한 이름의 80186입니다.


80186의 코어 사진입니다.

80186이 출시되고 나서 몇주 지나지 않아 바로 80286이 출시되었기 때문에 80186을 사용한 컴퓨터는 거의 없었습니다.


1985년에 출시된 80386입니다. 4004의 백배가 넘는 27만5천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였으며, 최초의 32비트 프로세서인 동시에 처음으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프로세서이기도 합니다.(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286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와 마찬가지로 인텔은 큰 압박을 받게 됩니다. 당시에는 '286으로도 충분하다. 386 컴퓨터를 생산할 필요가 없다'라는 사고방식이 매우 팽배했기 때문에 판매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텔의 고위층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마켓팅을 시작했고, 386을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2가지로 나눴습니다. 그것이 바로 80386SX로 내부 데이터 버스는 32비트로 80386과 같지만 외부 데이터 버스는 16비트였습니다. 이는 386의 우수한 성능과 286의 저렴한 가격이라는 장점을 각각 취한 것으로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기존의 386은 386DX로 이름을 고쳐 SX와 구분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저 낄낄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이야기 하자면, 제가 처음으로 써본 컴퓨터가 바로 80286인데 그 시기가 199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산 컴퓨터는 80386DX인데(인텔건 아니고 AMD거였지만) 그게 1994년이었습니다. 그때 486은 정말 전문가들이나 쓰는 거였고(가격 때문에) 출시된지 무려 9년이 지난 386이 메인스트림급이었으니 그 '286으로 충분하다'는 사고방식이 정말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컴퓨터란 물건은 곧 286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의 컴퓨터 신제품 출시 속도가 미국보다 많이 느렸고-펜티엄부터 출시 시기의 격차가 줄어들기 시작했지요- 그때는 컴퓨터란 물건이 참 비싼 것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80386은 27.5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있고 그 클럭은 12.5MHz로 시작해서 나중에 20, 25, 33MHz까지 올라갔습니다. 80386DX는 32비트 내/외부 버스에 32비트 메모리 어드레스 버스를 사용하여 최고 4GB 메모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이 4GB 메모리 제한은 지금의 32비트 운영체제/CPU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실행 모드와 안전 모드 외에도 가상 모드를 추가하여 여러개의 가상 8086 프로세서로 작동함으로서 멀티 태스킹 능력을 제공하였습니다.


1989년에 인텔이 발표한 80486입니다. 486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제품이며 많은 제조사들이 인텔 CPU의 발전 규칙-흔히들 말하는 무어의 법칙-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25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클럭은 25MHz부터 시작하여 33, 40, 50, 100MHz까지 올라갔습니다.


80486은 최초로 코프로세서를 내장한 CPU이며 x86 CPU 중에서 처음으로 RISC 기술을 사용하여 1 클럭 사이클의 명령 싱행 속도를 상승시키고. 또한 개선된 버스를 사용하여 메모리와 프로세서의 데이터 교환 속도를 높였습니다. 이러한 개선 덕분에 80486의 성능은 80387을 장착한 80386보다 4배 정도 빨라졌습니다.


80486의 코어 사진입니다.

인텔은 사용자층을 나누는 전략을 이번 486에서도 다시 응용하여, 코프로세서를 내장한 486DX와 내장하지 않은 486SX로 구분, 486SX의 가격을 저렴하게 낮췄습니다. 나중에 486의 배수 스펙을 고치면서 486DX2, 486DX4 등의 새로운 변종이 등장하게 됩니다. DX2는 프로세서의 내부 클럭이 외부 클럭의 2배로 작동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프로세서의 빠른 속도와 느린 외부 버스의 차이를 줄이게 됩니다.


1993년, 인텔은 펜티엄(Pentium) 프로세서를 발표합니다. 원래대로의 명명 규칙대로라면 80586이 되어야 되겠지만 '586'이라는 숫자를 상표로 등록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미국 법원의 판결 뿐만 아니라, 경쟁 회사들이 486말기에 486급의 제품에 586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판매하자 인텔은 최초로 자사의 제품에 명사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펜티엄의 코어 사진입니다.

펜티엄은 310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60MHz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200MHz 이상까지 클럭을 높였습니다. 1세대 펜티엄의 코드네임은 P54C이며, 나중에 MMX(멀티미디어 명령어 세트)를 추가한 제품은 P55C입니다.

처음에 출시된 60MHz와 66MHz 제품은 나중에 나온 소켓 7과 호환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유명한 내부 결함, 부동 소수점 연산 버그 때문에 제품 전체의 이미지가 매우 나빠지면서 판매가 잘 되질 않았습니다. 결국 당시 인텔의 CEO인 앤드류 그로브는 1993년 11월 29일, 전세계의 유저를 대상으로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 제품을 전격 회수하였습니다. 이때 리콜에 들어간 자금이 4억$였다고 하니 당시로선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결국 이것이 사용자의 믿음을 다시 확고하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펜티엄 MMX는 펜티엄의 기본 구조에 57개의 MMX 명령어 세트를 추가한 것으로서, 새로 추가된 명령어들은 비디오/사운드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데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로서 CPU의 멀티미디어 데이터 처리 효율을 높일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형식의 명령어 세트를 추가하게 됩니다. 탐스하드웨어의 테스트에 의하면 펜티엄 MMX 166MHz가 펜티엄 200MHz보다도 더 빠르다고 합니다.


1995년 가을에 인텔은 펜티엄 프로를 발표합니다. 처음으로 32비트 서버, 워크스테이션을 위해 설계된 프로세서였으며 고속 보조 설계, 기계 엔진, 과학 계산 등의 분야에 응용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550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고속의 L2 캐시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펜티엄 프로의 코어 사진입니다.

펜티엄 프로는 인텔의 기업 시장 진출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 것이지만, 16비트 프로그램의 성능이 동일 클럭의 펜티엄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인기를 모으진 못했습니다. 16비트 어플리케이션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에 32비트 전문 프로세서라는것은 너무 시대를 앞서간 제품이었지요.


1997년에는 펜티엄 2가 발표됩니다. 50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MMX 명령어를 계속 지원합니다.


펜티엄 2의 코어 사진

펜티엄 2는 처음으로 SEC 패키징(Single Edge Contact)을 사용하여 고속의 L2 캐시를 프로세서와 함께 하나의 기판 위에 장착했습니다. 이 방법은 제조 단가가 비싸긴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속의 L2 캐시를 CPU안에 포함시킬 기술이 없었습니다. 펜티엄 2의 뛰어난 멀티미디어 성능 덕분에 이때부터 멀티미디어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에는 펜티엄 2 제온(Xeon)이 출시됩니다. 이는 기존의 펜티엄 프로 제품군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중고급형 서버, 워크스테이션 시장을 공략하는 제품이었습니다. 제온은 상업용 프로그램, 인터넷 서비스, 데이터베이스, 기계, 자동화 설비등에 최적화 되었습니다. 펜티엄 2 제온은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더 고용량의 캐시를 장착하였고 4웨이나 8웨이 SMP 대칭 멀티 CPU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1999년에는 셀러론(Celeron) 프로세서를 발표합니다. 처음 나온 셀러론은 펜티엄 2에서 L2 캐시를 제외함으로서 가격을 낮추고 저가형 시장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러나 L2 캐시가 전혀 없는 셀러론은 그 성능이 매우 뒤떨어졌기 때문에 인텔은 나중에 펜티엄 2의 절반 용량(128KB)의 L2 캐시를 장착한 셀러론을 출시합니다. 

듀얼 셀러론 시스템과 듀얼 펜티엄 2 시스템의 경우 그 성능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가격은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셀러론이 고급형 시장을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며, 결국 인텔은 셀러론의 SMP 기능을 취소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역시 1999년에 인텔은 펜티엄 3를 발표합니다. 이것은 슬롯 방식의 구형 펜티엄입니다.


이것은 LPGA 패키징의 새 펜티엄3과 셀러론입니다.


펜티엄3의 코어 사진입니다.

펜티엄3부터 인텔은 70개의 명령어(SIMD, SSE)를 추가하여 네트워크 멀티미디어 확장, 3D, 스트리밍 서비스, 비디오, 음성 임식 기능 등에서의 성능을 높입니다. 펜티엄3부터 유저들은 인터넷을 통해 고화질의 영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1999년에 출시된 펜티엄 3 제온입니다. 펜티엄 2 제온의 차기작으로서 펜티엄 3에서 추가된 70개의 명령어를 그대로 지원합니다. 기업급 시장 외에도 전자 상거래 응용과 고급의 상업 계산 능력을 지원하며, 고속의 캐시외 시스템 버스 아키텍처를 통해 그 성능을 끌어올렸습니다.


펜티엄4 423 소켓 버전입니다.

2000년에 인텔은 펜티엄4를 발표합니다. 펜티엄4부터 고화질의 영상 제작, 인터넷을 통한 TV급 화질 영상 전송, 실시간 채팅, 화상 통신, 실시간 3D 랜더링, MP3 코덱의 빠른 연산, 인터넷을 통한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의 다중 실행 등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펜티엄 4 478소켓 버전입니다.

초창기의 펜티엄 4인 윌라멧은 4200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으며, 노스우드는 5천5백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0.18 미크론 공정으로 제조되어 1.5GHz의 클럭으로 시작했습니다. 1.5GHz라는 속도는 센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가는데 13초가 걸리는 것과 같은 속도입니다.


펜티엄 4 윌라멧 코어의 사진입니다. 130나노 공정입니다.

펜티엄4부터는 넷버스트 아키텍처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넷버스트 아키텍처의 장점입니다.
1. Faster System Bus. 빠른 시스템 버스
2. Advanced Transfer Cache. 고급 캐시 전송
3. Advanced Dynamic Execution, Execution Trace Cache, Enhanced Branch Prediction. 고급 동적 실행, 실행 추적 캐시, 향상된 분기 예측.
4. Hyper Pipelined Technology. 긴 파이프라인 구조(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이건 양날의 칼이지만 말입니다.)
5. Rapid Execution Engine. 빠른 실행 엔진
6. SSE2 멀티미디어 명령어 세트


펜티엄 4 노스우드 코어의 사진입니다. 110나노 공정입니다.

프로그램 명령어와 데이터가 처리 단계에 들어갈때는 시스템 버스 배열을 통해 들어가게 됩니다. 펜티엄 3의 외부 FSB는 133MHz였으며 1 클럭에 64비트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었고, 8바이트x133MHz=1066MB/s의 대역폭을 제공합니다. 펜티엄 4의 시스템 버스는 100Mhz밖에 되지 않으며 똑같이 64비트 데이터 대역폭이지만, AGP 4x와 똑같은 원리인 QDR 기술을 사용하여 대역폭 전송 속도가 최고 3200MB/s까지 가능합니다.


펜티엄 4 프레스컷 코어 사진입니다. 90나노 공정입니다.

따라서 펜티엄 4 프로세서의 시스템 데이터 전송 대역폭은 다른x86 프로세서보다도 빨랐을 뿐만 아니라 펜티엄 3 시스템의 시스템 버스에서 볼 수 있던 병목 현상을 해결했습니다. 이후 인텔은 시스템 버스 기술을 계속 개선하여 FSB 533, FSB 800 등의 새 스펙을 내놓으며 데이터 전송 속도를 올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펜티엄 4부터 듀얼채널 DDR을 지원하여 메모리와 CPU 간의 전송 속도를 늘렸습니다.


펜티엄 4 기반의 셀러론 프로세서

펜티엄 4는 또한 SSE2 명령어 세트를 추가하여 144개의 새로운 명령어를 지운하게 되었습니다. 128비트 데이터 압축의 경우, SSE는 4개의 단순 부동 소수점 형식을 통해 처리하지만 SSE2는 2개의 듀얼 부동 소수점 형식을 통해 자료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펜티엄 4 기반의 제온 프로세서

그 외에도 노스우드에서 하이퍼스레딩 추가, 프레스컷에서 SSE3/64비트 추가, LGA 방식의 775 소켓 도입, 테자스 코어 취소, 65나노 공정의 시더밀 등장 등등... 넷버스트 아키텍처에서 설명할 것이 많긴 하지만 이것들은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이니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사실 원본 글에서도 전혀 언급을 안하고 있지 말입니다.


펜티엄 4 기반의 제온 MP 프로세서


아이테니엄입니다.


인텔은 2001년에 아이테니엄(Itanium) 프로세서를 발표합니다. 아이테니엄은 인텔 최초의 64비트 프로세서로서 고급형 기업 서버와 워크스테이션을 위한 제품입니다. 아이테니엄에는 최신 설계를 도입하고 완전히 EPIC 기반으로 만들어져 전자 거래 안전 처리, 초대형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보조 기계 엔진, 미세 과학 연산 등의 분야에서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습니다.


아이테니엄의 코어 사진입니다.

다만 아이테니엄은 IA-64라는 독자적인 64비트 구현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기존 x86 과의 호환성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전용 운영체제/프로그램에서는 막강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기존 프로그램의 호환 모드에서는 보통 펜티엄4 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성능이 나오지요.


아이테니엄 2입니다.


아이테니엄 2의 코어 사진입니다.

아이테니엄 2는 아이테니엄을 기초로 하여 확장한 제품입니다. 기존의 아이테니엄에 최적화된 응용 프로그램과의 하위 호환이 될 뿐만 아니라, 50~100%의 성능 향상 효과까지 있습니다. 아이테니엄 2는 6.4GB/s의 시스템 버스 대역폭과 3MB의 L3 캐시등을 갖추고 있으며, 아이테니엄 2의 성능은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하드웨어 데스크탑보다 50% 높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이테니엄 몬테시토의 코어 사진입니다. 캐시가 24MB 장착되어 있으며 사용된 트랜지스터는 17억개에 달합니다.


펜티엄 M 입니다.

2003년에 인텔은 펜티엄 M 프로세서를 출시합니다. 기존의 모바일 펜티엄 2, 3, 펜티엄 4-M 제품들은 데스크탑 CPU의 설계 그대로에 절전 기능과 전원 관리 기능을 추가한 제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펜티엄-M은 모바일에 특화하여 완전히 새로 설계한 CPU입니다.


모바일 펜티엄 2입니다.

펜티엄 M은 855 칩셋과 인텔 프로/와이어리스 2100 네트워크 무선랜 기술과 결합되어 센트리노(Centrino)라는 모바일 플랫홈을 구성하게 됩니다.


모바일 셀러론입니다.

펜티엄 M에 추가된 802.11 무선 Wi-Fi는 센트리노 모바일 플랫홈의 완벽한 해결 방안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절전 기능을 내세우면서 센트리노 플랫홈은 지금까지도 그 인기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4세대 센트리노와 센트리노 프로까지 출시될 예정입니다.


모바일 펜티엄 3입니다.


펜티엄 D 8xx 스미스필드의 코어 사진입니다.

2005년 5월 26일, 인텔은 자사 최초의 듀얼코어 프로세서인 펜티엄 D를 출시합니다.


펜티엄 D 840입니다.

인텔의 엔지니어도 밝힌 바가 있지만, 펜티엄 D는 AMD의 애슬론 64 X2에 맞서기 위해 펜티엄 4 코어를 두개 붙이는 식으로 '급조'한 것입니다만, '급조'한 제품이 이정도라는 것은 인텔의 관록이 만만치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겠지요.


펜티엄 D 9xx 프레슬러의 뒷면입니다.


펜티엄 D 기반의 제온 코어 사진입니다.


펜티엄 D 기반의 제온입니다.


코어 듀오, 65나노 공정 요나의 코어 사진입니다.

인텔의 코어 아키텍처는 완전히 새로운 파이프라인 구조, 지능형 캐시 기술, 듀얼 코어, 공유 L2 캐시 등을 도입한 인텔의 새 제품입니다만... 이건 너무 최근작인데다가 너무 유명하니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듯 합니다.


코어 T2500입니다.


콘로 코어 사진입니다.


콘로의 아키텍처 다이어그램입니다.


코어 2 듀오 E4300입니다.

이것으로 인텔 쪽의 CPU는 대충 설명이 끝났는데... 그래도 CPU를 설명하면서 인텔만 나오고 AMD가 빠지면 너무 섭섭하겠지요. AMD CPU 역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만 원본 글에서 설명을 하지 않은 관계로- 간단한 설명만 곁들이도록 하겠습니다.


AMD 8080입니다.


AMD 8080-2-BQA입니다. 제일 아래줄에 보이는 Intel이라는 글자를 보고 기겁하실 분도 계시겠는데, 이때는 AMD가 인텔의 하청 업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MD는 생산만 하고 설계 같은건 전부 인텔에서 한 것 그대로지요.


AMD AMZ8002입니다.


AMD AMZ8068DC입니다.


AMD 8086입니다.


AMD 80186-3입니다.


AMD 80286-8-c2입니다.


AMD Am29000-25GC입니다.


AMD Am290300-25GC입니다.


AMD Am29040-33GC입니다.


AMD의 386DX입니다. 386부터 AMD가 단순 하청 업체가 아닌 별도의 업체라는 개념이 조금씩 섰지 말입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싼 값에 사는 물건이란 인식이 더 강했지만.


386 SX입니다.


386 DX-40입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제일 처음으로 산 컴퓨터에 장착된 CPU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486 SX2-66입니다. 486 시리즈가 참 많은데 사진이 이것 뿐이로군요.


AMD K5 PR100입니다. 이때부터 AMD도 처음으로 자사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펜티엄 100 정도에 해당하는 물건이로군요.


K5 코어의 사진입니다.


K5 PR133입니다. 이렇게 보니 PR의 역사가 참 유구해 보이는군요. 저기 보면 코어 전압이 3.52V라고 되어 있는데 요즘 나오는 CPU들의 전압이 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실로 무서울 정도입니다.


K6 233입니다. K6 시리즈의 인기는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역시 싼 값에 사는 물건이란 이미지였지만.


K6 코어의 사진입니다.


K6 300인데 뚜껑이 날라갔군요.


K6-2 350입니다.


K6-2 코어의 사진입니다.


K6-3 400입니다. K6 시리즈가 시리즈가 좀 많은 편이지요. K6은 AMD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게 해준 제품입니다.


K6-3의 코어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념비전인 K7 애슬론입니다. 애슬론이란 이름을 먼저 쓴 제품이라는 점 보다는, 이때 처음으로 인텔과 다른 슬롯/소켓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군요.


K7, 애슬론의 코어 사진입니다.


선더버드 코어입니다. 오버클럭커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지만 '전기먹는 괴물'이라는 평가도 들었지요.


이것은 듀론입니다. 셈프론의 선조 정도가 되겠군요.


팔로미노 코어입니다. 이쯤 되자 많은 AMD 애슬론 매니아들이 생겨났지요.


왼쪽이 서러브러드, 오른쪽이 바톤입니다. 팔로미노 코어가 정사각형이었던 것에 비해 서러브러드는 길고, 바톤은 더 길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K8, 애슬론 64의 754핀 CPU입니다. 최초 x86 호환 64비트 지원이라던가 하이퍼트랜스포트 버스, 메모리 컨트롤러 내장 등등의 개념을 갖춘 제품이지요.


역시 같은 754 핀입니다만 뚜껑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것은 같은 시기 서버용 제품군에 쓰였던 940핀입니다.


K8 옵테론의 코어 사진입니다.


그리고 듀얼 채널을 지원하는 939 핀입니다.


939 핀의 뒷면입니다.


940핀으로 나온 애슬론 64 3000입니다.


듀얼코어 프로세서인 멘체스터입니다.


멘체스터의 코어 사진입니다.


역시 듀얼코어인 윈저 코어입니다.


윈저의 코어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AMD의 희망이자 차기작, 바르셀로나 코어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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