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데 제 돈 주고 산 거 아닙니다. 빌려서 썼어요. 벌써 몇 달이 된건데 더 이상 묵힐 수가 없어 이제서야 대충 용두사미격으로 만들어 올리는 무성의한 사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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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LR처럼 센서 큰 카메라를 쓰고 싶은데 DSLR은 너무 크다? 지금이야 미러리스나 하이엔드 카메라 중에서도 DSLR 만큼 큰 센서를 쓴 제품을 많이 나와서 선택할 대안이 많지만, 한때는 시그마 DP 시리즈 말고는 고를 수 있는 게 전혀 없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그마 DP 시리즈는 예전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진 못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그마 DP 시리즈는 다른 카메라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포베온 X3 센서 말입니다.

 

시그마 DP2 메릴은 포베온 X3 메릴 센서를 써서 4600만 화소라 쓰고 이제 겨우 다른 카메라처럼 1500만 화소 급 해상도를 찍을 수 있게 됐습니다. 분명 발전은 발전이니 대단하다 칩시다. 그리고 또 뭐가 변했냐구요? 변한 건 많은데 쓸만한 건 없습니다. 아래 실제 사용 부분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시그마 DP2 메릴의 기계적인 성능은 여전히 안구에 습기가 찰 정도입니다. '이것이 정녕 2012년에 나온 카메라란 말인가'라는 평가를 들었는데. 그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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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쓰기 귀찮으니 스펙은 다나와 가서 보시고.

http://blog.danawa.com/prod/?section_m=DICA&prod_c=1737708&cate_c1=842&cate_c2=843&cate_c3=16876&cate_c4=0

 

저기 렌즈 앞캡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알고 계실 시그마의 렌즈 앞캡 그대로입니다. 시그마가 렌즈를 참 잘 만드는 회사인데 아무리 봐도 저 30mm 렌즈는 삼식이가 아니라 삼순이에요. 크기를 작게 줄여야 했으니 그건 그려려니 치지만, 백만 원이 넘어가는 카메라의 퀄리티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움직이는 속도라던가 최소 촬영 거리라던가 f2.8의 조리개 값 등이 아쉬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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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엔 무려 핫슈가 있습니다. 오오 역시 프리미엄 카메라야 하고 감탄하겠다면, 너무 프리미엄이라서 그런가 기존 DP 시리즈에 있던 내장 플래시까지 빼버렸음을 같이 확인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모드 다이얼 같은 것도 빼버리고 버튼으로 바꿨어요. 인터페이스는 이것저것 만들어 볼 것이 없어서 간단하고 편한 스타일입니다.

 

크기는 제법 큰데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진 않습니다. 그리고 잡기도 은근히 편합니다. 고무 그립을 붙여둔 건 아닌데 플라스틱에 돌기를 박아놔서 손이 미끄러지는 일은 없어요. 근데 좀 많이 싸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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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엔 삼각대 고정용 구멍도 있고. 커버를 열면 메모리카드와 배터리를 꽂을 수 있는데. 전원이 켜진 상태에서 저 커버를 열어도 경고 따윈 표시하지 않습니다. 그건 뭐 별 거 아니라구요? 이제 그럼 정말 별 거를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저 배터리로는 100장 정도 찍는 게 고작입니다. 괜히 배터리 두 개를 주는 게 아니에요. 배터리가 작은 것도 있지만 두 개 합쳐봤자 200장인데 이건 너무하지 않나요?

 

 근데 그 보다 더 너무한 건 따로 있습니다. 전에 소개했던 삼성의 클래스 10 SDHC 메모리카드(http://gigglehd.com/zbxe/7858394)를 꽂아도, 사진 한 장을 찍어서 저장하는 데 7초가 걸립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남들도 다 그러더라구요. 정말, 느립니다. 연사? 장식입니다. 버퍼에 들어간 사진을 열심히 저장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찍은 사진을 본다던가 등의 다른 조작은 안됩니다. 이 느려터진 속도가 DP2 메릴의 제일 큰 단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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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단점을 이야기했으니 그보다 덜한 단점을 부담 없이 말할 수 있겠네요. 우선 저기 있는 스크린 말인데, 3인치 92만 화소입니다. 이 정도면 요새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스크린이지요. 근데, 3인치 92만 화소를 쓰려면 사진을 찍고, 저장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재생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앞에서 말했지요? 7초입니다.

 

라이브뷰 상태에서 표시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찍자마자 나오는 퀵뷰는 92만 화소가 아닙니다. 640x480의 매우 구린 화면입니다. 왜 이렇게 구리냐구요? 그건 DP2 메릴에서 찍을 수 있는 동영상이 640x480이기 때문입니다. 처리 속도나, 센서 발열 등 때문에 해상도를 그렇게 낮춰놓은 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덕분에 평소에는 이 스크린이 절대로 92만 화소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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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마 DP2 메릴로 찍은 사진은 이렇습니다. 우선 f2.8이라니까 조리개 최대 개방하기. 이게 좀 극단적인 경우긴 하지만 저 정도로 날라가긴 합니다. 단렌즈인데 f2도 아니고 f2.8은 좀 아쉬운 스펙이긴 하지만, 배경을 흐리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느 정도 날라가긴 해요.

 

다만 여기서 문제. 최소 초점 거리가 28cm이기 때문에 매크로는 포기하시는 게 좋을겁니다. f2.8보다도 더 마음에 안 드는 게 최소 초점 거리더라구요. 그건 제 스타일이 조리개 개방을 잘 쓰지 않고, 사진을 바짝 붙여서 찍는 걸 좋아해서 그런 편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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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크롭하면 이렇습니다. 이건 딱히 할 말은 없네요. 그냥 그렇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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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속에 들어갔던 칫솔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칫솔을 보시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주변부 광량 저하-비네팅을 보시라는 겁니다. 최대 개방이라지만 비네팅이 꽤 있는 편. 그런데 크게 신경쓰이는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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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뒤에 비교적 강렬한 광원이 있으면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구요. 의외로 잘 잡습니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잡지 못할 때는 정말 못 잡기도 하는데... 케바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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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냐구요? 밥 먹으러 가서 찍은 오토 화이트벨런스 셋팅 사진입니다. 형광등 조명인 사무실이나 전철에서 찍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는데, 백열등이나 다른 색의 등이 끼어있는 곳으로 가면 아주 형편없어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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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오토 화이트벨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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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기준으로 화이트 벨런스를 잡아봤습니다. 망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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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환경에서, k-5는 이런 오토 화이트벨런스를 잡습니다. 펜탁스 만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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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항상 오토 화이트밸런스가 개판인 건 아닙니다. 이럴 때는 또 잘 잡잖아요? 그러니까 DP2 메릴의 화이트밸런스가 항상 별로라 말할 순 없지만, 실내에선 상당히 별로인 경우가 많다고 결론을 감히 내려보겠습니다. DP2 메릴로 실내 사진을 찍으려면 커스텀 화이트벨런스를 좀 잡을 줄 아셔야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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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그마 카메라는 '주광 전용'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실내가 열악해도 발전이 없어서 그런거려니 하고 넘어가 봅시다. 그럼 실외에선 어떨까요. 실외-그러니까 태양빛이 어느 정도 들어올 때는 꽤 사실적인 색이 나오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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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생각은 이 사진을 보고서 좀 달라졌습니다만. 꽃의 저... 색을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려나요. 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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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주제를 돌려봅시다. 포베온이 4600만 화소라 주장하는 이 센서는 다른 카메라의 1500만 화소 급 해상도가 나오는데. 센서 구성은 그려려니 해도 해상력이 좋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다. 라는 의견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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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습니다. 분명 해상력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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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보시죠. 대단히 협조적인 모델 고양이였습니다. 이 녀석이 얼굴을 안 보여줘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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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네요. 표현이 좋은 것 같긴 한데. 음. 솔직히 이거 하나 때문에 쓰고 싶을 정도는 아닙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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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최소 초점 거리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그거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 한계가 생깁니다. 이런 건 초점을 잡기도 힘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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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이질 못했으니 크기도 고만고만 합니다. AF를 잡다가 흔들린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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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만큼 작은 게 아니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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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믹 레인지는 별로 좋은 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극단적인 환경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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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2.8에 표준화각 단렌즈지만 배경은 그럭저럭 날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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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원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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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크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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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케라고 하는 빛망울도 나쁘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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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한 장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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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모드는 여러가지 있지만 그걸 골라가면서 쓰진 않았습니다. 펜탁스처럼 결과가 눈에 바로바로 보이는 거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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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거점이 9개인데 그걸 바꾸는 것 보다는 그냥 반셔터 잡고 옳기는 게 더 빠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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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에서 한 장 더. 이게 벌써 3달 전에 찍은 사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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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사진이 나오면 오오 혹시 이것이 바로 콘탁스 엔디의 그런 느낌인가! 하며 착각해 보기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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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대단히 멀쩡해 보이나 벌레가 아닌 나뭇잎을 잡았습니다. 이게 제일 크게 달라붙은 거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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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딱 이 정도나 찍는 용도로는 나쁘진 않지만. 그러기엔 너무 비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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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마 DP2 메릴에 쓴 렌즈가 삼식이가 아닌 삼순이인 건 작게 만들기 위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덕분에 표준 단초점 렌즈임에도 불구하고 왜곡이 좀 거슬립니다. 아래쪽의 건물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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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입니다. 감도 자체는 6400까지던가 꽤 올라가는데 그거 다 쓸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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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ISO 800에서 위로 더 올리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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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그 닉을 밝힐 수 없는 어떤 기글 회원은.

 

자신이 신체가 허약하여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닐 수가 없지만 음식 사진은 찍는 걸 좋아하니 시그마 DP 시리즈를 사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이폰 사세요. 왜냐면 아이폰은 DP보다 싸고, 가볍고, 실내 화이트 벨런스를 잘 잡거든요. 감도는 두 녀석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아마 이 사용기를 보신 분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뉠 것 같네요.

 

아아 그렇구나 DP2 메릴 안 사야지 하는 분들은 어차피 DP2 메릴이 있어도 그 장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분들일 겁니다.

 

그리고 좋은 카메라를 쓰레기로 만들어놨네 하고 열을 내실 분들은 DP2 메릴로 분명 좋은 사진을 찍으실 수 있을 분들이시겠지요.

 

근데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엄청 많을 거라는 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