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4의 발표 직전에 나온 글이라서 최신 제품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그래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지 하는 정도라면 볼 만합니다.

 

스마트폰은 일년마다 새 제품이 나오지만, 게임기의 라이프 사이클은 10년에 달합니다. 1994년 초에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온 후, 소니는 총 3대의 게임 콘솔과 2대의 휴대용 게임기를 내놨는데, 이 5대가 모여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제국을 세웠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몇 대를 거쳐 성장해 왔으며, 유명 게임의 성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은 추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20년 동안 플레이스테이션은 배반, 몰락, 루머를 겪어 왔으며,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탄하게 나아온 것이 아니라 험산준령을 겪어 왔습니다. 지금 게임의 변혁이라는 갈림길에 서서, 소니는 어떻게 반격을 해 나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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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의 탄생. 배반의 댓가

 

소니는 사실 게임 시장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소니 뮤직의 워크맨은 전세계를 뒤덮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소니가 게임 업계에 발을 딛도록 만든 건 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영원한 라이벌 닌텐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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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세기 80년대 말.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는 거의 담합 수준이었습니다. 개발자들이 게임 화면과 성능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대용량 스토리지를 써서 패미컴의 게임 팩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닌텐도는 새 콘솔 게임기인 슈퍼 패미컴에 CD 롬을 쓰기로 정했는데요. CD는 소니와 필립스가 공동으로 만든 표준이었습니다. 그러니 닌텐도가 소니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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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쉽에 따라, 소니는 닌텐도가 생산하는 슈퍼 패미컴의 외장 ODD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소니는 소니 로고가 붙은 슈퍼 패미컴의 호환기기를 만들기로 했지요. 비록 소니의 슈퍼 패미컴은 게임 팩을 꽂을 순 없고 CD만 쓸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파트너 관계가 진행되면서, 닌텐도의 사장은 소니에게 위협을 가하게 됩니다. 계획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닌텐도는 앞으로 출시되는 게임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통제하게 될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필립스와 접촉해서 새로운 슈퍼 패미컴 CD를 개발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1991년의 CES에서 닌텐도는 원래 9시에 열기로 했던 발표회를 취소하고, 소니와의 파트너 관계를 취소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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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버전 슈퍼 패미컴. 완성도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이 때도 이름은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에게 배신당한 소니는 게임 관련 제품의 제작을 그만두는 걸 고려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항목을 주도하던 쿠타라기 켄은 워낙 열이 받아 있었던지라, 게임 팀을 이끌고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줄여서 SCE를 세웁니다. 그리고 1994년에 시대의 한 획을 긋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을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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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플레이스테이션의 프로토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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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플레이스테이션의 컨트롤러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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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플레이스테이션의 설계도

 

 

플레이스테이션 1. 한 시대의 시작

 

쿠타라기 켄이 인솔했던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가 만들어낸 제품, 플레이스테이션은 매우 스타일리시하면서도 깔끔한 디자인을 갖췄으며, 슈퍼 패미컴이 '장난감'이라는 이미지를 보인 데 비해 플레이스테이션은 가전 제품이라는 분위기를 더욱 풍겼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1은 클럭 33MHz로 작동하는 MIPS R300A 32비트 RISC 프로세서, 최대 해상도는 640x480이었고, 회전, 변형, 반투명, 다중 스크롤 등의 다양한 특수 효과를 쓸 수 있었으며, 최대 4천 개의 움직이는 캐릭터, 매 초에 36만 개의 폴리곤을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하드웨어 스펙으로 슈퍼패미컴을 뛰어넘었지요.

 

플레이스테이션의 저장 장치 역시 그 장점이 뛰어났습니다. 슈퍼패미컴은 오직 간단한 미디 사운드나 수준 낮은 효과음 정도만 낼 수 있었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은 CD급 사운드와 영화 수준의 CG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CD 한 장의 용량은 700MB, 당시 슈퍼패미컴의 용량은 10MB 정도였으니, 이건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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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이 출시되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게임 개발자들은 이 새로운 기기의 매력에 저항할 수가 없었지요. 기술과 용량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플레이스테이션이 실현했거든요. 게임기가 출시된 후 써드파티 회사들이 모여 닌텐도의 독점에서 벗어나려 했고, 슈퍼패미컴 왕국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건 파이널 판타지 7이 되겠네요. 줄곧 닌텐도로만 출시되던 파이널 판타지가 소니를 택한 사건은 소니가 게임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플레이스테이션 출시 2년 후 나온 닌텐도 64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열기를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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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은 1994년 12월에 일본에 출시됐고, 다음해 9월에는 미국과 유럽에 출시됐습니다. 2000년에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의 개선판인 PS 원을 발표했는데요. 둥글둥글한 디자인에 메뉴 인터페이스를 비롯한 사소한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또 PS원은 외장 모니터를 달아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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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2000년의 황금같은 시간 동안,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플랫폼으로 무수한 명작들이 출시됐습니다. 철권, 소울 칼리버, 그란 투리스모, 바이오 해저드, 사일런트 힐, 릿지 레이선, 메탈 기어 솔리드, 파이널 판타지 7/8/9, 다이노 크라이시스, 천추 등등. 2005년 3월까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1의 판매량은 1.02억 대, 게임 판매량은 9.61억 개를 기록했고, 2006년 3월에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의 단종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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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 2. 왕조의 건립

 

플레이스테이션의 제일 큰 경쟁상대는 닌텐도가 아니라 세가 새턴이었습니다. 세가 새턴은 플레이스테이션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성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2D 성능은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뛰어났지요. 또한 세가가 직접 제작한 아키이드 게임- 버추어 파이터, 버추얼 레이싱 등을 그대로 이식했으니까요. 물론 새턴의 3D 성능은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부족했지만, 세가의 3D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했다는 건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세가는 성능이 더욱 강력한 드림캐스트를 발표합니다.

 

소니는 드림캐스트의 강력한 성능을 보고 깜짝 놀렸습니다. 하지만 고객들에겐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는 더 좋은 걸 준비중이라고. 드림캐스터가 출시된 후 소니가 공개한 플레이스테이션 2의 정보를 보면, 영화와 다를바 없는 아름다운 데모가 자주 나왔고, 더 강한 성능을 낼 것이라고 계속해서 냄새를 풀익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플스2를 기다리고 드림캐스트를 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때 드림캐스트의 소프트웨어는 어느 정도 부족한 점이 있었는데요. 일본식 RPG가 부족하다는 게 드림캐스트의 제일 큰 약점이었습니다. 10억엔을 투자한 쉔무는 잘 만든 게임이긴 해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요. 이건 애시당초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문제였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곤 사쿠라대전 3나 바이오해저드: 코드 베로니카 정도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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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플레이스테이션 2가 일본에 출시됐고, 같은 해 10월과 11월에는 유럽과 북미 시장에 나왔습니다. 초기 플레이스테이션이 출시되고 얼마동안은 판매량이 별로였던 것과 달리, PS2는 발매와 동시에 릿지 레이서 5, 스트리트 파이터 EX3 등의 킬러 게임이 같이 나왔습니다. 1년 후에 플레이스테이션 2의 판매량은 천만 대를 넘어섰고, 동시에 플레이스테이션 2 플랫폼에서 처음으로 판매량 백만 장을 넘긴 타이틀, 귀무자가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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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 2의 성능은 플레이스테이션 1과 비교해서 크게 상승했습니다. PS2는 소니와 도시바가 함께 연구 개발한 294Mhz 128비트 이모션 엔진 CPU, 32MB 램을 내장해 지오매트리 연산 성능이 1초 당 6천만 개의 폴리곤을 만드는 데에 이르렀고, 부동소수점 연산 성능은 펜티엄 3보다 3배가 빨랐습니다. 480p, 576p, 720p, 1080i 출력을 지원했으며, 그래픽스 신시사이저 GPU는 147MHz로 작동하며 4MB 비디오 램을 따로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PS2는 스토리지 포맷을 바꾸려는 소니의 야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는데요. 소니는 출시와 동시에 PS2가 단순한 게임기가 아니라, 훌륭한 DVD 플레이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PS2의 성공에는 영화 애호가들의 도움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PS2의 판매량은 2001년 3월에 천만 개를 돌파했고, 세가는 눈물을 머금고 드림캐스터를 단종하며 콘솔 시장에서 발을 뺀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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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가 발을 뺀 자리에는 닌텐도의 게임 큐브와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가 선후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3개 회사가 시장을 형성하는 국면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쟁은 더 심해졌지요. 닌텐도 게임큐브는 드디어 롬 카트리지를 포기하고 8cm DVD 디스크를 도입했으며, IBM 파워PC 750 CXe의 성능은 PS2보다 못하지 않았으나, 써드파티와 닌텐도 관계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진 못했습니다. 게임 큐브로 나온 타이틀이라면 닌텐도의 마리오 시리즈와 젤다 시리즈, 그리고 포켓 몬스터 정도가 인기를 끌었고, 캡콤은 게임큐브로 독점 출시한다는 바이오해저드 4의 판매량이 생각보다 뒤떨어지자 PS2 버전을 내놓게 됩니다. XBox는? 총으로 쏘고, 차를 운전하고, 공놀이를 하는 게임들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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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는 플레이스테이션의 황금기였습니다. 게임의 수나 품질 모두 뛰어났지요. 파이널 판타지 10, 드래곤 퀘스트 8,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2, 킹덤 하츠, 발키리 프로파일 등의 대작 RPG 뿐만 아니라,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 GT4, 삼국무쌍 등의 게임도 큰 인기를 끌었지요. 소니가 직접 개발한 갓 오브 워 시리즈는 유럽과 북미에서 큰 인기를 모았고, 캡콤의 데빌 메이 크라이도 반응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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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과 PS One의 관계처럼, 2004년에 소니는 PS2 슬림 시리즈를 내놓았습니다. 본체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 세계에서 제일 얇은 가정용 게임기가 됐지요. 2005년 11월에는 PS2가 전세계 판매 대수 1억대를 기록해, 세계에서 가장 빨리 1억대 판매를 기록한 콘솔이 됩니다(이 기록은 나중에 NDS가 깨지만). 2011년까지 PS2의 판매량은 총 1억 5천만 대를 넘겼지요. 2012년에 소니는 일본에서 PS2의 판매를 중단해, 장장 12년에 걸친 집권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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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SP, 플레이스테이션 비타-PS Vita. 주머니 속의 전쟁

 

휴대용 게임기를 닌텐도 게임보이 어드밴스드-GBA가 지배하고 있을 때, 소니는 이 수익이 풍부한 시장을 보고서 침만 삼키지 않았습니다. 2004년 12월에 소니는 자사 첫 휴대용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줄여서 PSP를 발표합니다. 당시 PSP는 PS2의 크기를 줄인 제품으로 인식됐으며, 2004년 E3에서 GT 레이싱, 삼국무쌍, 테일즈 시리즈, 릿지 레이서, 스트리트 파이터 등의 신작이 선보였습니다. 18GB UMD를 스토리지로 삼았으며, 성능이 가장 뒤어난 휴대용 게임기였습니다. 릿지 레이서의 수준 높은 그래픽은 PS2 버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무선으로 PSP를 연결해 게이머들이 경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2005년에 PSP는 유럽과 북미시장에서도 일본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어가게 됩니다. GTA 시리즈의 PSP 버전은 서구에서 매우 큰 반응을 일으켰지요. PSP가 천만 대 판매를 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심지어 PS2보다도 훨씬 짧았습니다. PSP의 판매량이 늘어날수록 크랙 역시 늘었는데, 초기 모델인 PSP-1000의 경우 해커들에 의해 완전히 파해쳐졌지요. 그래서 소니는 PSP-2000, PSP-3000 등의 기기를 내놓아 해킹을 막으며, 제품 원가를 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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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발표 이후 iOS 게임의 인기가 높아지며, PSP의 대용량 UMD는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었습니다. 다운로드 게임이 시장의 주류가 됐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소니는 PSP Go를 발표했습니다. 게임을 다운받아 즐긴다, 상당히 괜찮은 개념처럼 보였지만 평론가들의 예측과는 달리 PSP-Go의 반응은 그저 그랬습니다. 일본에서 PSP-Go의 판매량은 겨우 한 달에 몇십 대에 그쳤고, 서구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PSP-Go는 발표 1년만에 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대신 PSP는 2012년까지 7천만 대를 팔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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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에 소니는 2세대 휴대용 게임기인 PS 비타를 전세계 동시 발매합니다. 이 기기는 PS2와 PS3 사이에 위치하는 성능을 지녔으며, 터치스크린, 터치 패드, 중력 감지, 카메라, 듀얼 스틱 등의 다양한 입력 기기를 갖췄습니다. 또 전용 스토리지 게임 카드, 3G, WiFi까지 쓸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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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3DS의 초기 판매량은 형편없었지만,3DS의 가격을 만엔 인하하고 캡콤의 몬스터 헌터 3G와 몬스터 헌터 4 등의 독점 게임이 나온 후에야 3DS의 상황은 나아졌습니다. 소니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2013년에 PS 비타의 가격을 역시 만엔 인하하고 소울 새크리파이스를 월말에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이었을 뿐 아직까지 PS 비타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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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테이션 3. 천상에서 나락으로

 

세가가 드림캐스트를 먼저 출시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상대가 마이크로소프트로 바뀌었고, 결국 웃게 된 쪽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였지만 말입니다. PS2가 잘 나가던 2005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차세대 게임기인 Xbox 360을 2005년 E3에서 발표하고, 같은 해 11~12월에 유럽, 미국, 일본에서 판매합니다. 이런 빠른 행동에 소니는 제 때 대처하지 못하고, 2005년 E3의 모든 관심이 Xbox 360에게 쏠리게 됩니다. 소니는 그저 사람들을 웃게 만든 듀얼쇼크나 PS3의 설계 개념 등을 내놓았을 뿐, 실물을 공개하진 못했지요.

  

Xbox 360은 트리플코어 3.2GHz IBM 파워PC 아키텍처의 제논 프로세서와 ATI R500 기반 제노스 그래픽을 달았습니다. 이 특제 IBM 파워PC 프로세서는 실제로는 소니에서 나온 것이지만요. 사실 2003년부터 PS3와 Xbox 360의 연구 개발이 시작됐는데, 소니는 연구 개발의 앞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2001년에 소니, 도시바, IBM은 40억 달러를 들여 셀 프로세서를 개발하기로 하고, 이를 PS3에 넣기로 결정했습니다. 2003년 초에 셀 프로세서가 시험 생산 준비를 마쳤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IBM과 접촉한 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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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도시바, IBM이 셀 프로세서를 연구개발하고 있었던 때,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검증된 파워PC 아키텍처를 썼지요(인텔을 쓰기 전에 애플이 썼던 것이 바로 파워PC였습니다). 또 NVIDIA에서 고급형 GPU를 사려 했지만 NVIDIA가 비싼 값을 부르자,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이렉트 X 9에서 NVIDIA에게 물을 먹이는 것으로 복수했습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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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획에 따르면 소니, IBM, 도시바가 만든 셀 프로세서는 2004년 11월에 설계를 마치고 생산에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불행한 것은 셀 프로세서의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 첫번째 셀 프로세서는 무려 6주가 연기된 후에야 겨우 생산에 들어갔는데,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XBox 360을 좀 더 일직 내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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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3보다 빨리 출시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는 상당히 큰 모험, 그러니까 Xbox 360에 파워PC 프로세서를 쓴다는 발상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이런 시도를 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또 생산 원형을 바로 생산 라인에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소니는 셀 프로세서의 성능을 첮러하게 테스트한 후에야 생산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런 차이는 나중에 Xbox 360이 죽음의 레드링을 띄우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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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가 Xbox 360을 출시를 축하하고 있을 때, 소니 PS3의 연구 개발에는 또 다른 문제가 출몰하게 됩니다. 도시바가 제공하는 GPU의 생산이 어려워서, 몇 달 후에나 출시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니는 PS3를 장장 1년이나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Xbox 360은 PS 독점으로 나오던 유명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었는데요. 릿지레이서는 최초로 Xbox 360으로 나왔고, 파이널 판타지 13 역시 Xbox 360으로 나왔습니다. 메탈기어 솔리드도 결국은 Xbox 360 진영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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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006년 11월에 소니 PS3가 일본, 유럽, 미국에서 동시에 출시됐습니다. 3.2GHz 셀 프로세서와 NVIDIA G70 아키텍처 기반의 RSX GPU를 썼지요. 실제 성능은 Xbox 360과 비슷했지만 가장 큰 특징은 블루레이 드라이브를 썼다는 것입니다. 출시 당시에 PS3는 매우 저렴한 블루레이 플레이어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PS3의 출시는 소니 블루레이와 HD-DVD 사이의 경쟁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것은 소니가 닌텐도 Wii와 마이크로 Xbox 360을 추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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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3 시절에 소니는 줄곧 1등을 바짝 따라가는 2인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PS3가 발표된 후 지금까지 Xbox 360의 판매량이 줄곧 높았거든요. 2012년에는 두 기기 모두 7천만 대를 돌파하면서 차이를 좁혔지만, Wii가 가지고 온 체험형 컨트롤러 열풍이 문제였습니다. PS 무브는 마이크로소프트 키넥트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독점 타이틀 역시 갓 오브 워, 메탈 기어 솔리드 4, 언차타드 정도에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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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PS4와 Xbox One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는 상황입니다. 하드웨서 스펙부터 시작해서 각종 부가 기능에 출시 시기까지 포함하면, PS4는 Xbox One을 이기는 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아직 정식 출시가 되진 않았으니 기다려 봅시다.

 

소스: http://www.evolife.cn/html/2013/691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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